고단한 삶에 눈물은 가끔 단비가 된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부모님이 생각보다 경제적으로 많이 힘드시다는 걸 직감했다. 부모님은 도망가듯 다른 지역으로 거처를 옮겼고 친할머니와 우리 세 식구가 살던 집엔 할머니와 나 단 둘이 남았다. 집으로 부모님을 찾는 사람들이 예고도 없이 찾아왔고 집전화로 그들에게 오는 전화를 할머니는 나를 바꿔주었다. 대부분 나도 얼굴을 아는 부모님의 지인들이었기에 나에게는 늘 친절히 대해주었지만 엄청난 공포감을 느꼈다. 나를 지켜주는 어른은 아무도 없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의 나는 누구보다 밝고 적응도 잘했다. 어려운 형편에 성실한 제자를 안타깝게 여긴 선생님들도 많이 도와주셨고 정말 소수의 친구를 제외하고 나의 어려운 형편을 아는 친구들은 없었다. 그 시절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는 교복이다. 교복을 사려면 못해도 2-30만원은 들었는데 그 교복을 살 돈이 없었다. 입학에 가까워져서 몸에 맞지도 않는 헐렁한 것을 구해 중학교에 입학했고 고등학교 때는 선배들이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기증한 교복을 물려받아 입학했다. 그래도 나는 배우고 공부할 수 있어서 행복했고 친구들을 만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할머니가 쥐어주던 몇 천 원을 주머니에 넣고 친구들과 문방구에서 팔던 100원짜리 아이스크림도 먹을 수 있었고 준비물도 살 수 있었고 친구 생일 선물도 사줄 수 있었다. 그러다 너무 힘들어서 울고 싶은 날이면 방 안에서 이불을 꼭 눌러쓰고 할머니가 들리지 않게 숨죽여 울곤 했다. 고등학교 때 취업한 사촌언니가 잠시 우리 집에서 산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할머니가 아침마다 나은이는 깨우면 바로 일어나서 학교 갈 준비를 하는데 사촌언니는 그렇지 않다며 고모들에게 칭찬하듯 이야기한 적이 있다. 나는 투정 부릴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는데 몇 년을 같이 살았어도 할머니는 나를 잘 몰랐다. 그렇게 나는 늘 어른스럽고 대견한 아이였고 사람들 앞에서 눈물보다 웃음을 짓기 위해 노력하는 아이였다. 가끔. 그 시절의 나를 꽉 안아주고 싶을 때가 있다. 어떻게 그 6년이라는 시간을 버텼을까.
스물한 살 때 어떤 오빠가 “ 너는 정말 좋아하는 게 뭐야? “라고 꼬치꼬치 캐묻길래 “ 저는 그렇게 좋아하는 게 없는데요?” 라며 쌀쌀맞게 대답한 적이 있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좋아한다는 감정을 가질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좋아하면 욕심이 생기니까. 가지고 싶고 잃어버리기 싫으니까. 일부러 취향을 지우기 위한 작업을 했던 것 같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도 나는 나름 좋아하는 것들이 생겼지만 그 감정에 아직도 적응이 되질 않는다. 무기력한 무망감에 빠져 한동안 눈물이 나질 않아 고생했던 적이 있다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살았던 시기였다. 그래도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 앞에서 눈물이 많이 헤퍼졌다. 책을 읽으면서도 울고 영화를 보면서도 잘 운다. 별이 가득한 저녁 퇴근길이 꽤나 근사해서 울컥, 잠들기 전 수고했다고 나에게 말해주면서도 울컥한다. 고단한 삶에 눈물은 가끔 그렇게 단비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