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1.
나의 스물한 살, 호주의 서쪽 도시 퍼스 시티에서부터 3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더 들어가면 있는 Caple이라는 지역의 농장에서 브로콜리와 브로 콜리니를 따던 추억이 가끔 생각난다. 농장 근처에 마련해준 숙소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 어스름한 새벽녘에 차를 타고 반쯤 연 창문 사이로 맡았던 그 새벽의 공기와 일하고 집에 돌아오면 겉에 입은 우비 속에서 축축이 젖어있던 작업복과 두꺼운 고무장화, 그때의 우리만 아는 그 풀냄새와 땀냄새들. 함께한 나의 시절 인연들. 나에겐 처음인 것이 너무 많았던 그 시절. 그때도 숨기는 게 익숙했던 내 마음. 이 떠오른다. 낮이면 햇볕 쨍쨍한 파란 하늘이 있었고 밤이면 금방 나에게로 떨어질 듯 가깝게 있던 별들이 가득했는데 나는 그런 것들을 하나도 즐기지 못하고 1년을 보냈다. 심리적으로 너무 힘들 때 한국을 떠났고 큰 용기를 내어 간 호주에서의 생활도 순탄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때의 경험으로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으니 겁낼 것 없다는 교훈을 얻었고 힘들어도 버티는 법을 배웠다. 반짝반짝 빛나길 바랬던 나의 20대는 호주를 가기 위해 준비했던 20살부터 넘실대는 파도에 끊임없이 휘청거리는 작은 돛단배 같았고 나는 쉴 새 없이 흔들리는 배 안에서 멀미가 밀려와 구역질을 하며 늘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완결을 맺었다
2.
제주에 온 지 1년이 넘은 지금, 그때와 같이 나는 도망치듯 제주로 왔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아직도 고민하고 있다.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 나는 글을 쓰고 싶고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두고 싶다. 이제는 피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는데 그것이 어떤 것을 정리해야 하는 것일지, 어떻게 계획을 잡아나가야 하는 것인지, 얼마나 나의 직관을 따를 것인지,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달마다 찾아와 나를 괴롭히는 생리통처럼 매번 변명하지 않고 비겁하지 않게 살기 위해 진통을 버텨야 한다. 오늘 드라마 ‘비밀의 숲 2’가 끝났다. 시즌 2의 캐치 프레이즈는 ‘침묵하는 자 모두 공범이다’였다. 비겁하게 침묵하는 삶을 살지 않기 위해 느리고 괴로워도 정도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잠시 살다 가는 세상이라도 그렇게 살다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