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곧 비라도 쏟아질 것처럼 하늘에는 회색 구름이 가득했다. 오늘은 뭘 해먹을지 고민하다 냉장고에 마땅한 반찬거리가 없어서 대충 슬리퍼를 신고 집 앞 마트에 갔다. 할인 중인 30구짜리 계란을 두 손에 들고 집으로 올라가다 계단에서 넘어져 계란도 깨지고 내 무릎도 깨졌다. 무릎이 아파서 절뚝대면서도 뭔가 해 먹어야 될 것 같아 된장찌개를 끓였다. 팔팔 끓는 찌개 속에서 다시마와 멸치를 넣은 팩을 꺼내다 뜨거운 국물에 손을 데었다. 오늘은 집에 가만히 있어야 하는 날인 기운이 맴돌았다. 6시쯤 작은 택배라서 우체통에 택배를 넣어두었다는 택배기사분의 문자가 왔다. 출간 전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서평단을 신청했는데 아마도 그 택배인 것 같아 바로 내려가 택배를 가져왔다. 그런데 택배의 한쪽 귀퉁이가 젖어 있었다. 안은 괜찮겠지 하고 뜯어보니 가제본의 윗부분이 흠뻑 젖어 있었다. 물인 줄 알았는데 향수 냄새 같은 것이 배어있었다. 혹시나 해서 다시 내려가 우체통을 열어보니 우체통 안은 물기 하나 없이 마른 상태였다. 우선 출판사에 연락을 남겨두고 서평단 신청을 계속할 예정이어서 이런 책 택배를 계속 받아야 할 텐데 다음번에도 이런 식으로 온다면 곤란할 것 같아 택배사에 글을 남길지, 문자를 보낸 기사분에게 직접 연락을 남길지 고민을 했다. 고민을 하다 택배회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문의글을 작성하는데 괜히 안 좋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항의하며 배상을 요구하는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다음부터는 조심해달라고 부탁하는 문의글을 남기면서도 보복당하진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들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배달 같은 것이 잘못 와도 쉽게 항의하지 못했다. 우리 집 주소와 나의 연락처가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혼자 살게 된 후로는 경계가 더 심해졌다. 노파심일까 아니면 여성을 상대로 한 일련의 범죄들에서 우연히 살아남은 탓일까.
나는 20대 초반에 강남역 11번 출구 쪽에 위치한 아이엘츠 학원을 6개월 정도 매일 다닌 적이 있다. 20대 중반 외항사를 준비하던 시절에는 신분당선 쪽 학원을 다녔고, 그 후 직장을 생활을 하면서도 신논현역 교보문고를 가서 책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던 2016년 5월 17일 새벽, 강남역과 신논현 사이 노래방 화장실에서 피의자 김성민이 1시간 동안 6명의 남성을 지나치고 처음 들어온 20대 여성을 살해 한 사건이 발생했다.
얼마 전 회사 관련 직원 분들이 제주도에 내려와 같이 식사를 했다. 제주시 오일장 근처의 식당이었다. 비가 와서 집 앞에서 택시를 탔다. 차가 조금 막히면 1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가끔 애월이나 한림 같은 제주도 서쪽을 갈 때 버스를 타러 가던 곳이었다. 2020년 8월 30일, 제주시 민속오일시장 주차장 주변을 배회하며 범행 대상을 물색하던 20대 피의자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제주시 도두동에서 자택이 있는 제주시 용담동까지 걸어서 퇴근하던 여성을 살해했다.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라고 진술한 피의자는 현금 1만 원과 신용카드 등을 훔쳐 달아났다고 한다.
단순히 부주의한 택배 관리에 대한 건의를 할 때도 목숨에 대한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까지 이어지는 나의 회로는 지나친 망상일 걸까. 수많은 죽음으로부터 우연히 살아남았다면 이러한 두려움은 갖는 것이 지극히 정상이지 않은가. 그 날 강남역 그 화장실에 내가 갔다면, 얼마 전 제주 오일장 그 길을 내가 걸었다면, 나도 피해자가 되지 않았으리란 법은 없다. 어쩌면 우리는 세상의 모든 범죄와 사건들을 피하고 오늘, 살아남은 것이다. 우연히 살아남은 오늘, 남겨진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번민에 사로잡히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