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9 30일 저녁 8 30, 재방송도VOD 서비스도 하지 않는 오로지 본방송으로만 KBS2TV에서 볼 수 있다는 추석특집 나훈아 콘서트를 한다는 소식에 부모님과 시골 외삼촌댁에 꼭 보시라 연락을 드리고 나도 시간에 맞추어 TV 앞에 앉았다. 워낙 콘서트가 예매하기 힘들기로 소문이 나서 후기로만 들은 열정적인 무대들이 궁금한 마음에 본방사수를 결심했다. 2시간 30분동안 공연을 하면서 74세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그의 목소리는 젊고 단단했다.

 오프닝 무대부터 총 3부에 걸쳐 이어지는 모든 무대가 하나하나 공들인 티가 났다. 중간 중간에 토크타임을 통해 그의 삶의 철학도 알 수 있었는데 기억에 남는 것 몇 가지를 적어보았다. 사람들이 본인을 신비주의 가수라고 하는데 본인은 꿈을 파는 사람이라 지칭하며 어느 순간 꿈이 가슴에 고갈이 된 것 같아 세계를 돌아다녔더니 잠적했다고 하고, 은둔했다고 하고 안 좋은 소문이 많이 돌았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거의 모든 곡을 직접 만드는 분이니 신곡을 만드는데 걸리는 시간이 6개월 최대 1년이 걸리는데 그 작업을 하는 동안에도 잠적을 했다는 말이 나왔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하는 가수의 모습이 참 씁쓸해 보였다. 그리고 삶에 끌려 다니지 말고 안 가본데도 한번 가보고 안 하던 짓을 해봐야 세월이 늦게 간다며 세월의 모가지를 비틀어서 데리고 갈 것이라 말한 부분도 인상 깊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급히 세월이 가지 않게 더 많은 것을 경험해보고 도전해보고 살며 세월에 끌려가지 말자고 다짐했다. 뭔가 나의 청춘을 응원받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파격적인 신곡 테스형!은 인터넷을 뒤집어 놓았다. 그 ‘테스형’이 소크라테스일 줄 누가 알았겠나.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형을 언급하는 가사가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지만 철학적이기도 했다. 그의 노래 가사들은 전부 그의 삶의 철학이 고스란히 녹아져 있었다. 반복되는 단어 위주의 요즘 노래들을 듣다가 스토리와 철학이 담긴 음악을 들으니 음악에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를 둘러싼 많은 소문이 있지만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그를 보니 그것들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무대 위의 진정한 스타였고 2시간 30분동안 끊임없이 공연을 이어가면서 지친 기색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진정한 가수였다.

 무대마다 사물놀이와 한복 같은 한국적인 요소들이 적재적소에 들어가 있어서 코로나로 지쳐있는 대한민국 국민에게 힘을 주고 싶어 기획했다는 콘서트의 의미가 더 와 닿았다. 하나의 방송 프로그램일 뿐이지만 이 방송을 통해서 코로나로 지치고 어려운 사회 속에서 조금 더 힘을 내어 내가 진정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고 싶다는 의지가 생겼다. 내가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었을 때도 그와 같이 젊은이들에게 응원과 의지를 선물해 줄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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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바이, 웬디 (2018. 05. 30 개봉)

 

 요일마다 다른 색 옷을 입는 주인공 웬디는 자폐증을 앓고 있다. 웬디는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트랙 시나리오 공모전에 시나리오를 제출하기 위해 4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시나리오를 쓴다. 재활센터에서 생활하고 있던 웬디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조카의 사진을 전해주던 언니에게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그렇게 생긴 그들의 갈등이 절정으로 달했을 때, 웬디는 준비하던 시나리오 공모전 제출 기한이 주말이 끼어 자신의 시나리오가 제때 도착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포기할 수 없었던 웬디는 직접 LA에 가서 시나리오를 제출하기로 결정하고 떠나는 요일에 맞는 빨간색 니트를 입고 길을 나선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는 자폐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지고 있는 세상의 편견과 선입견은 꿈을 향한 걸어 나가는 웬디에게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며 차별할 수 있는 자격을 누가 가졌는가?

또 한 가지 인상 깊었던 부분은 웬디 자신의 가족인 언니보다 함께 재활센터에서 생활한 선생님과 강아지가 그녀의 인생에서 더 가족이라는 형태에 가까운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사회가 규정한 이름만 가족이 사람들이 아닌 서로 이해하고 연대하는 이들이 웬디에게는 가족이었다. 때때로 우리의 인생도 나를 공감하고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는 가족보다 나를 존중해주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타인으로 인해 더 많이 위로받고 행복감을 느낀다.

 

영화가 절정을 지나 끝자락으로 향해 갈수록 스탠바이에서 한 걸음을 내딛는 행동을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 절실히 느꼈다. 나의 인생을 돌이켜보면 늘 주저하고 망설이던 스탠바이, 그저 스탠바이. 부정당하고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 언저리만 뱅뱅 돌며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나의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어'라고 비겁한 자기 위안을 하며 나를 되려 고꾸라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좌절하고 주저앉고 싶은 상황에서도 공모전 시나리오를 쓰는 웬디를 보며 ‘나는 언젠가 작가가 되어 글을 쓸 거야’ 하는 허무맹랑한 생각은 던져버리고 당장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상상만으로 손에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갈망하며 우울 속에 잠식되는 것보다 차라리 미숙하더라도 도전하고 그러다 넘어져서 온몸이 시퍼런 멍이 온몸에 주렁주렁 달린다 해도 닥치지 않은 것에 겁먹지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묵묵히 해나가야겠다고 다짐했다. 벌써 오늘로 여덟 걸음을 걸었다.  

 

 

 

*이 영화를 보기 전, 줄거리 설명을 보고 몇 번을 그냥 넘겼었다. 당시 줄거리 설명만 보면 이 영화는 현시대의 흐름에 아주 뒤처지는 내용이었다. 서술된 줄거리만 보면 정말 마음에 당기지 않는 영화였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를 보고 난 후 영화에 대해 다시 검색해 보니 리뷰를 적은 사람들이 모든 검색 사이트에 통일되었던 그 전 줄거리 설명의 부적절함을 지적하고 있었다. 이 영화가 주는 내면의 잔잔한 파동을 너무나 가볍게 서술하여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지금은 모두 수정되어 어떤 내용인지는 따로 언급하지 않겠지만 적절한 줄거리 설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해 준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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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열의 음악앨범 (2019. 08. 28 개봉)

 

 얼마 전 <유열의 음악앨범>이라는 영화를 봤다. 배경이 90년대부터 이어지는데 엄마가 남겨준 빵집을 여자 주인공인 미수는 친언니 같은 은자 언니와 함께 운영한다. 그러던 중 우연히 빵집에 오게 된 남자 주인공 현우가 함께 일하게 되면서 서로 애틋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어느 날 현우의 옛 친구들이 빵집에 찾아오고 은자에게 가불을 받아서 나가버린 현우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 후 빵집은 문을 닫았지만 미수와 현우는 미수 제과점 앞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고 미수의 집에서 현우와 함께 밤을 지새운다. 두 사람이 재회한 바로 다음 날 군입대를 한다는 현우에게 미수는 몰래 그의 메일 주소를 만들어준다. 그런데 쪽지에 만들어 준 이메일만 적고 비밀번호는 적어주지 않아서 현우가 군대에 있는 동안 그는 미수의 편지를 하나도 읽지 못하지만 미수는 읽지 못할 걸 알면서도 그가 비밀번호를 알아내 주길 바라며 그에게 계속 편지를 쓴다. 그녀의 학번이었던 비밀번호를 그가 기억해내어 풀어내게 되고 그들은 설레는 마음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잡는다. 둘이 만나기로 한 저녁 현우는 일하던 곳에서 시비에 얽히게 되고 그 과정에서 휴대폰이 부서져 버려 그녀의 연락을 받을 수도 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된다. 미수는 둘이 연락하기로 한 시간을 훌쩍 넘기고 집에 돌아와 그에게 이메일을 적어 보낸다.

 

-

무슨 일이 있었나 보구나 그런데 연락 없는 네가 오히려 고맙다

난 지금 아주 많이 후진 상태야 너와 오랜만에 만나 웃고 떠들 상태가 못된다는 거지

내가 싫어 누가 날 보는 것도 슬프다

모두 내가 한 선택인데 왜 이렇게 불안할까 근래 가장 좋았던 일은 딱 하나

현우 네가 비밀번호를 풀어줬다는 거 간만에 크게 웃었다

현우야 좋은 일 생기면 다시 연락하자 나도 좋은 일 생기면 연락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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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수는 그리워했던 현우와 연락이 되어 너무 설레고 기뻤지만 지금 이 모습으로 너를 만나지 않게 되어 다행이라고 말한다. 미수의 양가적인 감정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어릴 적에 어른이 되어 반짝거릴 나의 모습을 흔히 상상한다. 그렇게 성인이 된 몇 년 후, 나만의 멋진 삶을 상상하며 살았는데 내가 너무 다른 삶을 살아가고 위축되어있을 때, 그 어릴 적 꿈을 함께 공유했던 이가 다시 나타날 때의 반가움과 같이 떠오르는 비틀어진 것 같은 나의 삶도 떠오르게 된다. 그가 너무 보고 싶지만 이런 모습의 ‘나’와 만나지 않아서 너무 다행이라는 그 마음. 그동안 직면하지 않으려 애써 고개를 숙이고 현실에 타협하고 살아가는 나에 대한 환멸이 느껴졌다. 그렇게 꾹꾹 눌러 담았던 자신의 감정을 토해내는 이메일을 그에게 전달하고 우는 그녀의 모습에서 나를 보았다. 닥쳐진 현실에 움츠린 채 버티고 살다 한순간에 무너지는 감정을 오롯이 받아들일 때 그 절망감이 느껴졌다. 영화를 보며 이 부분이 가장 가슴에 남았다. 한 구석에 묵혀두어 곰팡이 쓴 감정이 피어올랐다. 또다시 울컥, 했다.

 

 내가 미처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이나 사고 또는 내가 겪어보지 못한 세계를 영화를 통해 가슴 깊이 전달받았을 때 오는 희열과 감동이 있다. 어떤 영화를 보고 평점을 주고 장면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감독의 세계관까지 파악하는 것도 나름의 재미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 시절 나에게 맞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영화를 보는 것, 책을 보는 것 까지도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잠식된 것은 아닐까. 그렇게 나의 시선의 초점이 흐려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에게 묻는다. 그렇게 너를 잃지 말라고 꾸짖듯이. 

 

 

 

 * 주연배우들의 자연스럽고 풋풋한 감성적인 연기도 좋았지만 배우 김국희님의 연기가 참 좋았다. 어쩌면 흔한 클리셰로 가득한 영화의 평면적 구성에도 이 영화가 좋았던 건 배우들의 연기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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