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은 복기가 중요하다. 대국을 복기하며 이미 놓아진 수와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던 다양한 수를 생각한다. 초등학교 때 나는 바둑학원을 다녔다. 그때 300수가 넘는 대국 기보를 매주 외워서 시험을 봤는데 100수 이상 200수 이상 외우기 같은 레벨을 나누고 점수 카드를 받는 식의 학습법이었다. 나는 제일 높은 점수를 받고 싶은 승부욕에 기보를 통째로 외우곤 했다. 그렇게 공존보다는 경쟁을 배웠다. 그리고 나는 경쟁에 굉장히 취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대회를 출전하는 순간 깨달았다. 중급반 이상이 되면서 매일 두세 번의 대국을 치렀던 학원생 중 한 명인 동생을 첫 대회에서 만났을 때, 나는 이겨야 하다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게다가 엄마까지 대회에 같이 오셔서 생각이 더 복잡해져 버렸다. 그 날 2번째 토너먼트 경기에서 탈락한 나는 엄청난 패배감이 들었다. 대회 중 한 경기에서 진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학원에서는 매일 이기던 동생을 결국 이기지 못했다는 굴욕감과 그런 동생을 이기려고 마음먹었던 나에 대한 환멸, 사범님과 부모님의 기대의 부응하지 못한 나에 대한 실망감. 그리고 그들에게 포기당할 것 같은 두려움. 나는 나의 패배와 실패를 견딜 수가 없었다. 나를 둘러싼 많은 것들이 나를 혼란스럽고 힘들게 만들었다. 나도 정리하지 못해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마음을 눌러 담으며 그냥 다르게 포장하기로 결심을 했다. 핑계 댈 수 있는 것들이 생기면 비겁하게 포기하는 법을 택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속아 넘어가도 나는 그런 나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행복하지가 않았다. 도망치는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다. 이 결론을 토해내기까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바둑을 복기하듯 나의 삶을 복기하며 마음 구석구석에서 보이는 감정의 상흔들에 정신 차리기가 힘들어졌다. 들추어진 나의 상처가 소독되는 중이어서 이토록 쓰라린 건지 그대로 곪아가는 중이라 후벼 파는 고통이 찾아오는 것인지 너무나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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