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체력이 약하다. 위장도 약하고 더위에도 약하고 추위에도 약하다. 힘이 들면 데굴데굴 구르는 급성 위염이 오고 살갗이 베인 듯 아픈 대상포진도 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련스럽게 또 걷고 떠나고 일하고 도전하고 배우고 그렇게 살았다. 그렇게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얕은 숨조차 쉬어지지 않을 때까지 말이다. 그러다가 절박하게 숨을 쉬어보고 싶어 졌다. 이제 숨을 쉬며 살고 싶어 졌다.

 

 

 

2.

 

 

 “ 나은 씨, 혹시 나태해져 본 적 있어요? “

 

상담사 선생님에게 태어나서 처음 들어 보는 질문을 받았다. 듣자마자 질문의 생소함에 당황했지만 이내 그 질문에 답을 찾으려 나태했었던 기억들을 곰곰이 떠올려보았다. 그런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자 괜히 안절부절 나에게 질문을 던진 그분을 그저 빤히 바라보며 대답했다. 

 

 

.. 없는 것 같아요

 

그럼 나은 씨가 나태하다고 느끼는 모습은 뭐예요?"

 

.. 어렵네요 그냥 저는 누워서 TV를 보거나 휴대폰을 하거나 하면서 늘어져 있는 저의 모습이 너무 싫어요. 그런 모습을 나태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쉼 없이 움직이고 공부하고 배웠어요 끊임없이. 그러네, 그랬네요 제가. 

 

 이어지는 질문에 대답의 말을 내뱉으면서 하나씩 깨달아졌다. 나를 몇 주간 쭉 지켜보던 선생님이 이런 질문을 한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 나은 씨, 누구나 그래요. 가끔 혹은 자주 누워서 늘어져라 TV도 보고 휴대폰도 하고 그래요. 그리고 그래도 돼요

 

.. 그래도 돼요?"

 

 그렇구나, 그렇게 해도 됐구나. 정말 몰랐다.

 

 

3.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이 두려웠다. 내가 행복을 꺼내어 이야기하는 그 순간부터 행복이 나에게서 전부 달아나 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행복이 도망 간 그 자리에 불안과 두려움이 가득 채워져 전보다 더 불행해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행복한 감정을 느끼는 방법을 의식적으로 잊어버리려 애썼다. 그렇게 나의 감정을 콘크리트로 빈틈없이 틀어막고 나는 사람들에게 이제 내가 어른이 되었다고 말했다.  

 

 

 

4.

 

 이성을 잃고 흐트러지는 게 싫어 술을 마시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술을 꽤나 마시는 편이지만 취하면 나의 아주 약한 부분이 건드려져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내 모습이 싫다. 알딸딸하게 술을 마시면 괜히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이 밤이 더 캄캄해 보이고 점점 늙어가는 부모님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서 눈물이 난다. 네 날 사랑하지 않아 서럽고 정지 버튼 없는 세월에 힘없이 늙어버린 엄마 아빠의 모습에 서글퍼진다. 나는 아직 감당할 자신이 없는데 보내고 싶지 않은데 평생 느끼고 싶지 않은데 제발 나를 두고 떠나지 말아 줘. 먼저 가지 말아 줘. 살아만 있어줘. 나를 사랑해줘. 아이 같은 외침이 나를 뒤흔든다. 술은 몸에도 해롭지만 마음에도 해롭다.

 

 

 

5.

 

 5일간의 긴 휴무 중 3일은 빨래를 했다. 이틀은 이불 빨래를 하고 하루는 수건 같은 것을 세탁기에 돌렸다. 오늘 낮에 바짝 마른 수건을 털털 털면서 빨래를 개는데 문득 빨래에서 친할머니 냄새가 났다. 할머니의 냄새라기 보단 옛날에 할머니가 해주신 빨래에서 나던 냄새와 비슷했다. 그렇게 아주 오랜만에 할머니 생각을 했다. 할머니 생각이 나면 누구와 이야기해야 하나 골몰히 생각하다 아빠가 떠올랐다. 떠올리기만 해도 울컥하는 바람에 아빠에게 전화하지 못했다. 이렇게 전하지 못하는 이야기가 많은데 삶은 짧고 나는 용기가 없다.

 

 

 

'기억보다 선명한 기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직 주저앉기엔 아쉬운 인생이다  (0) 2020.09.10
다른 사람의 인생을 표절하지 않는 삶  (0) 2020.09.07
착함의 굴레  (0) 2020.09.07
전하지 못한 편지  (0) 2020.09.06
'가치'의 정의  (0) 2020.09.04
Posted by soso_Le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