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일했던 동생의 아버님 상가에 동료들과 조문을 다녀왔다.

 

 문득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나에게 고백하던 날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결혼  이혼을 했고 우리 어머니와 재혼한 것이며 나에게 12살 차이가 나는 이복오빠가 있다고 했다. 어느새 사춘기가 되어버린 딸이 혼자 그 사실을 알고 잘못된 생각을 할까 노파심에 이야기한다고 그는 보태어 설명해주었다. 씩씩하고 강한 그가 내 나이 다섯 즈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날 이후로 처음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인 날이었다. 아버지가 우리 엄마와 재혼을 하였고 나에게 이복오빠가 있다는 것보다 늘 돌처럼 단단했던 아버지의 눈물이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중년에 들어선 후로 아버지의 삶은 끊임없는 고행이었다. 그리고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는 그의 고통의 굴레는 현재 진행형이다. 고백 이후로 아버지와 대화다운 대화를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나누어 본 적 없던 나는 아버지에게 묻고 싶어 졌다. 칠십, 고희를 눈 앞에 둔 아버지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 졌다.

 

 

 

 -아버지에게

 

 아버지, 저예요.

문득 아버지의 인생을 생각해보았어요.

그런데 제가 아버지를 항상 먼발치서 바라보기만 하고 한 번도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삶을 물어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어요.

아마도 얼마나 힘들었을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말하지 않아도 느껴져서 물어보면 더 슬퍼질까 봐 그랬던 것 같아요.

아버지, 아버지의 인생은 어땠어요?

 어머니 아버지 이야기를 하면 어릴 적에 참 많이 울었어요.

너무 고생하고 사셔서 ‘내가 우리 집안을 꼭 일으키겠어!’ 다짐했지만

나하나로도 삶이 벅차서 아무런 도움이 못 되는 나 자신이 싫어서

그게 너무 속상하고 서글퍼서 아버지에게 미안해서 아무 말도 못 했어요. 

그런데 아무 말도 못 했던 지난날이 더 미안해지네요.

저는 아버지가 얼마나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하시는지 알아요.

그래서 항상 딸로서 자부심이 있어요.

아버지로 인해 저도 성실하고 정직하게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해요.

희한하게 그렇게 살다 보면 이 세상은 살아가는 게 더 힘든 것 같아요. 아버지처럼..

그래도 그런 사람들이 행복하고 복 받는 세상이었으면 좋겠어요.

세월이 흘러 어느덧 딸이 31살이 되었어요. 말도 안 되죠? 

저도 제 나이가 믿기지 않아요.

근데 그것보다 더 믿기지 않는 건 아버지의 나이예요. 

나의 기억 속에 아버지는 40대에 멈추어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수원에 살 때, 아마도 과일가게를 할 때였던 것 같아요.

어느 날 늦은 밤 퇴근하시며 사다 주신 돈가스가 참 맛있었어요.

그렇게 항상 아버지와 어머니는 저에게 맛있는 것들을 사다 주셨던 기억이 나요.

정말 맛있었는데. 한 번도  못 했어요. 

우리 가족이 함께 여행 한 번 가보지 못했지만 저는 그걸로도 너무 행복했던 것 같아요.

이토록 우리 가족의 삶은 부단히 고달팠지만 그래도 행복했던 순간들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요.

어릴 적부터 부모님이 더 이상 고생 안 하시게 내가 성공해서 빚도 다 갚아주고

경제적으로 자유롭게 해드리고자 하는 큰 포부가 있었는데

저의 삶은 예상보다 훨씬 더디게 흘러가고 있네요.

그래도 한 걸음씩 차근차근 걸어 나가고 있으니 우리 오래오래 단란한 가족으로 함께 살아요.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나를 아버지의 딸로 태어나게 해 줘서 정말 감사해요. 사랑해요. 언제나.

 

-하나뿐인 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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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oso_Lee :